[창작] 황금 사각형 (1/3) - 명탐정 설홍주의 사건수첩 제 2탄 -
글: 한동진 / 원안: 한상진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의 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사태를 예고라도 하듯이, 이미 그 해 봄부터 경성 시내에는 불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조만간 전쟁이 터질 거란 이야기를 수군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찌 돌아가건 설홍주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여보게, 왕도손 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일개인이 막을 수는 없는 일일세. 왜인들이 총과 칼을 들고 중국을 쳐들어가건 러시아를 쳐들어가건, 나로서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네."

"그건 너무 지나치게 패배주의적인 말이로군."

내가 비아냥거리자 그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두 사람의 희생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나라도 당장 목숨을 내놓겠네. 하지만 안중근이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을 저격해도, 김상옥과 나석주가 폭탄을 던져도, 박열이 왜왕(일본 천황)의 암살을 계획해도, 왜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네(주 1)." 설홍주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선인들이 패배주의에 물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먹고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날씨는 정말 좋군. 이런 게 진짜 봄 날씨지."

활짝 열린 창문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쪽빛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햇빛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했다.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봄이란 사실을 가슴 깊이 만끽할 수 있었건만, 설홍주는 담뱃불을 붙이며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할 일도 없는데 날씨만 좋으면 뭐 하겠나."

"아니, 잠깐만, 할 일이 없다니? 분명히 저번 주에 사건을 하나 의뢰 받았을 텐데?"

"아, 그거 말인가? 이미 다 처리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면서 담배 연기를 길게 흘렸다. "저번 주말에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장사영 남작을 찾아갔지. 평소엔 대일본 제국의 남작이라며 모가지가 부러져라 힘을 주고 다니던 녀석이 사색이 되어서 넙죽 엎드리는 꼴을 보니 은근히 통쾌하더군."

"그래서 어떻게 했나?"

"두 번 다시 김희숙 양을 건들지 말라고 점잖게 권고했지. 계속 그런 짓을 했다간 작위고 뭐고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거란 경고를 덧붙여서 말이지." 설홍주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대일본 제국의 귀족 나리께서 아주 꼴 좋게 되셨군." 나도 같이 낄낄거렸다.

"조선인 귀족들이 다 그렇지. 도박이나 계집질에 미쳐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엄청난 돈을 순식간에 날려먹는 주제에 나라를 팔아먹어 챙긴 작위로 모가지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노라면 구역질이 날 정도야. 하지만 별 수 없지. 대일본제국의 작위라는 건 그런 개돼지 같은 놈들한테나 어울리는 거니까."

"그 말을 레이시치 경부가 들으면 자네를 불령선인(주2)으로 간주해 체포할 걸세."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겐 너무나 가혹한 세상이야."

설홍주는 창가의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구며 바깥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다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엔 희망이란 게 남아 있는 것 같군."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손님이 오고 있다네, 손님이." 설홍주는 손을 들어 길 건너편에서 우리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청년을 가리켰다. "어쩌면 지적인 흥분과 도전 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을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때문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군."

"자네의 희망을 꺾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만, 의뢰인들이 거창한 사건보다는 시시한 사건을 가져올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으면 좋겠군."

"글쎄, 어느 쪽일지는 곧 알게 되겠지. 아, 지금 막 대문을 열고 들어왔어. 조금 있으면 얼굴을 볼 수 있겠는 걸."

잠시 후, 쿵쾅대는 발소리가 전주곡처럼 울리고 허도순 부인의 목소리가 후렴구처럼 이어졌다

"설홍주 씨, 손님 왔어요."

그녀는 우리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고, 아까의 청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설홍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허 부인. 제발 부탁인데 문을 열 때는 먼저 노크를 해 주십시오."

"이봐요, 설홍주 씨. 노큰지 뭔지 그런 왜놈들 관습을 따라 하고 싶진 않으니까, 억지로 강요하진 마세요."

허도순 부인은 불퉁스럽게 대꾸하며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러자 설홍주는 어깨를 움츠리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별 수 없지.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집주인을 거역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거 쓸데없는 일 때문에 인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저는 설홍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인 한의사 왕도손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전 강원도 영릉에서 올라온 나일산이라 합니다."

이제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젊은이였다. 눈매가 서글서글하여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고, 말하는 태도와 행동거지는 침착하고 차분했다. 양복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손에는 한 권의 영어 원서를 들고 있었다.

설홍주는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연희전문(현재의 연세대) 수물과(수학/물리학과)를 다니고 계신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나일산의 목소리엔 당황스런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제가 연희전문 학생이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일산 씨, 제게는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지, 아니면 킴볼의 [일반물리학]인지를 분간할 정도의 지성이 있습니다(주 3)." 설홍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책을 교재로 쓰는 곳은 연희전문 수물과죠. 그리고 수물과의 베커 교수님(주 4)은 특별히 총애하는 제자들에게 검은색 빠이롯트(주 5) 만년필을 선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신 포켓트에는 바로 그 만년필이 보란 듯이 꽂혀 있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다 알고 계신 겁니까?" 나일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가 하는 일에는 사소한 지식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확한 결론을 유추해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관찰력과 냉정한 추리력을 겸비하고 있어야죠."

"그렇다면 설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뭔가를 더 추리해 내실 수 있으신지요?"

나일산이 장난스레 묻자 설홍주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아직 장가를 가지 않고 혼자서 학교 근처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주변에 아편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등을 추리해 낼 수 있죠. 그리고 근 10년 사이에 집안의 경제적 사정이 많이 나빠진 것 같습니다만, 이건 추리라기보다는 추측의 범주에 포함시켜야겠군요."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에 나일산은 얼굴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기가 막힌 일이군요. 방금 말씀하신 건 모두 사실입니다. 설 선생님께선 추리가 아니라 제 뒷조사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 흥분하지 마십시오. 제가 괜한 말을 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설홍주는 손을 설레질 치며 말했다. "제가 당신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고, 뒷조사를 할 틈은 전혀 없었습니다. 방금 말한 건 모두 관찰과 추리로 알아낸 겁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추리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요령만 알면 간단하죠. 목 깃에 때가 묻은 구깃구깃한 와이셔츠를 입고 손가락엔 결혼반지를 끼지 않은 남성이 기혼자일 리가 없죠. 아직 학생인데 고향이 강원도라고 하셨으니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요. 그리고 아까 악수를 할 때 나일산 씨의 몸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아편 냄새를 맡았습니다. 낯빛을 보니 본인이 피우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집안 사람이나 친구들 중에 아편 상용자가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설홍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시선을 나일산의 발치로 옮겼다. "그리고 대단히 비싼 맞춤 수제화를 신고 계신데 가죽 상태를 보아하니 적어도 10년은 된 것 같군요. 아마 아버님께서 신으시던 구두를 물려받으신 거겠죠. 10년 전엔 그런 구두를 맞춰 신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하다면, 그 사이에 가세가 기울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겠죠."

그 말이 끝날 무렵 나일산의 얼굴에선 불쾌한 빛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는 설홍주 앞에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제 생각이 너무 모자라서 오해를 하고 말았군요.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튼 설 선생님의 혜안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아닙니다. 이런 건 별로 쓸데없는 잔재주에 불과할 뿐이죠. 그보다는 여기 오신 용건부터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그래야겠죠." 나일산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실은 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저희 집안은 한때 강원도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조상님들 중에는 높은 벼슬을 지내신 분도 여럿 되고, 유자 진자 쓰시는 할아버님께선 대한제국의 대신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성함은 시자 언자 되시는데, 그런 가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평소에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잠깐만요, 춘부장의 성함이 어쩐지 귀에 익군요." 설홍주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튀겨 딱 소리를 냈다. "응암 나시언 선생님이라면 12년 전에 강원도에서 만세운동(주 6)을 주도하셨던 분이시죠?"

"맞습니다. 설 선생님께서도 저희 아버님을 알고 계시는군요. 당시 아버님께선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 군중을 선도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셨죠. 왜놈들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싶었는지, 그때부터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훼방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살림이 어려워지신 모양이군요."

"글쎄요, 그때부터 어려워진 게 맞긴 맞습니다만……"

나일산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나와 설홍주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탐정이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설홍주는 내게 눈을 찡긋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와 이 친구 모두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함부로 떠버리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께선 얼마 가지 않아 이대로 가다간 파산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언젠가 다시 정상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몸을 낮춰 놈들의 감시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셨죠. 그래서 직접 경영하시던 사업체를 정리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의 거의 대부분을 처분해서 모종의 장소에 감춘 다음, 마치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셨습니다."

"괴롭지만 현명한 선택을 하셨군요. 그런데 나시언 선생님께서 은닉하신 재산은 대략 어느 정도나 됩니까?"

설홍주의 물음에 나일산은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을 했다.

"아마 15만원(현재 시세로 45억 원 가량)은 너끈히 될 겁니다."

"15만원이라고요? 그거 정말 엄청나군요!"

나는 큰소리로 외쳤고 설홍주는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요. 멈추지 말고 계속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버린 양반 가문의 사람들처럼 곤궁한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답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빠듯하게 사는 형편이었죠. 그 와중에도 아버님께선 저와 형님의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 형님은 어릴 적부터 영특해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샀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부끄럽게도, 일본 명치대(메이지 대학)에 들어간 뒤로 술과 아편에 빠져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죠. 덕분에 아버님과 어머님은 매일같이 형님 걱정으로 밤을 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두 달 전, 동네 어르신들과 장기를 두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님께서 갑자기 정신을 잃으시고 길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급히 집으로 모셔와 눕힌 다음에 의사를 불렀습니다만, 병세는 나날이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아버님께선 당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하셨는지 서둘러 일본에서 형님을 부르라 하셨죠. 그러나 형님이 탄 배가 미처 부산항에 들어오기도 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건 저와 저희 어머니뿐이었습니다. 한동안 정신을 잃고 계시던 아버님께선 힘겹게 눈을 뜨고 절 보시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네 형이 올 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구나. 비록 지금은 주색에 곯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못난 놈이긴 하나, 일훈이가 네 형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부터 유언을 남길 터이니 너는 잘 들어 두었다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네 형에게 전해야 한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왜놈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임야를 모두 처분해 감춰야 했다. 나라를 되찾지도 못하고 가문의 재산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조상님들께 죄스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에게 재산을 감춘 곳을 알려주기에 앞서, 그 분들의 존함과 업적을 바로 알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나의 마지막 의무일 것이다.

우리 금성 나씨의 중시조이신 나자 총자 례자 쓰시는 선조님께선 고려 초기에 삼한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우니, 고려 태조께선 그 분의 초상을 공신당에 그려 붙이고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하셨다. 그 아드님이신 은자 고자 쓰시는 분께서는 자의대부로 공빈승을 지내고 금산군에 봉해지셨지. 13세 선조이신 대자 용자 쓰시는 분께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놈들을 물리치는 데 앞장서시니, 선조 임금께선 그 공을 높이 사서 일곱 자 삼지창과 넉 자 청룡도를 하사하셨다(주 7). 그리고 15세, 우리 충장공파의 시조이신 순자 호자 일자 쓰시는 분께서는 문과에 급제하신 이후에 사헌 감찰과 예조 좌랑을 지내시다가 이조 정랑을 거쳐 선전관청의 종 4품 선전관으로 등용되셨고, 나중에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이조 참의와 승정원 좌부승지를 역임하셨다.

우리 조상님들께선 나라에 높은 공을 세우시고 만일을 대비해 적지 않은 재물을 비축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걸……]

그 순간, 아버님께선 가늘게 몸을 떨면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셨습니다. 제가 서둘러 아버님의 머리를 받쳐 들고 입안에 고인 피를 닦아냈습니다만, 더 이상은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 거름…… 거름이……]

아버님의 굳어져 가는 혀끝에서 나오는 말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저 조각조각 끊어진 단어의 파편에 불과했죠. 그리고 그걸 마지막으로 아버님께선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난 2월 3일, 자정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조선의 거성(巨星)이 너무 일찍 지셨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뒤늦게나마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설홍주는 깊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고인께서 유언을 남길 때, 재산을 숨긴 장소를 정확하게 언급하지 못하시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겠군요?"

"예,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나일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형님이 상주가 되어 상을 치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터지기 시작했죠.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형님은 아편에 빠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막대한 빚을 진 처지였거든요. 당장 갚아야 하는 돈만 수백 원이었죠. 그래서 발인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산을 찾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님께선 살아 생전 재산을 어디에 어떤 형태로 감췄는지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고 철저하게 함구하셨습니다. 어머님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계실 정도였으니 친척이나 친지 분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형님은, 아버님께서 전재산을 황금이나 보석으로 바꿔서 집안 어딘가에 숨겼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동원해 온 집안을 뒤집어 엎었습니다. 다락방과 창고를 뒤지고 앞마당과 뒷마당, 마루밑을 파헤친 건 그저 예행연습에 불과했죠. 그 다음에는 벽지를 찢고 마루를 들어내고 구들장을 뜯어내서 안쪽을 살피더니, 기둥과 주춧돌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막판에는 수백 수천 장에 달하는 지붕의 기왓장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해 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도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죠.

그쯤 되자 형님도 집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가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대신에 미처 완결되지 못한 유언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일산아,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우리 충장공파의 시조께선 순자 호자를 쓰시는데, 어째서 아버님께선 순자 호자 일자라고 말씀하신 걸까?]

[글쎄요, 돌아가시기 직전이니까 가벼운 착란 상태에 빠져서 존함을 착각하신 것이겠지요. 너무 과한 의미를 두지 않은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말로 형님의 마음을 되돌리기는 너무 늦은 뒤였죠. 형님은 유언에 뭔가 있다고 확인하고선 족보를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15세 파조님부터 아버님 항렬에 이르기까지, 파보와 대동보를 글자 하나 빼먹지 않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읽어 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습니다(주 8). 게다가 이미 30년쯤 전에 종갓집에서 우리 파보를 참고해 대동보를 고쳤기 때문에 둘 사이엔 별다른 차이점도 없었죠.

형님은 아버님께서 임종 직전에 언급하신 '거름'이란 단어에 주목해서 텃밭에 뿌리려고 쌓아둔 거름 더미를 쇠스랑으로 파헤쳐 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거름을 헤쳐봐야 냄새만 날 뿐이었죠. 그런 식으로 두 달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나일산은 입술을 비틀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 동안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설홍주는 거진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잘 들었습니다. 그간의 경과를 아주 조리 있게 잘 설명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선 지금은 어딜 조사하고 계신지요?"

"뒤져볼 구석이 남아 있질 않으니 문제죠." 그는 푸념조로 말했다. "앞뒤가 막힐 대로 막히자 형님은 머리 회전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로 더욱 열심히 아편을 피워댔습니다. 그러다 보니 판단력이 둔해지고 중독자 특유의 광증(狂症)이 심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삽을 들고 뛰쳐나가 선산의 파조묘(派祖墓)를 파헤치려 하는 걸 겨우 뜯어말려야 했죠."

나일산은 가족의 치부를 밝힌다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양 어깨 사이에 깊이 묻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설 선생님을 찾아 뵌 겁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선생님께서 난관에 봉착한 사건을 잇달아 해결하니 왜경들조차 한 수 접고 상수로 모신다 들었습니다. 부디 저희 형님을 도와 숨겨진 재산을 찾는 일에 힘을 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례는 결코 섭섭지 않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사건을 놓칠 수야 없죠. 당연히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을 수락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나일산은 서둘러 물었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일산 씨의 형님이란 분은 상당한 외곬수인 것 같군요. 그런데 그 형님께, 외부인인 제가 이 일에 끼어드는 걸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도 이미 동의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물쭈물 지체하고 있을 필요가 없겠죠." 설홍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에 꽂혀 있던 열차 시간표를 꺼내 들었다. "강원도라면 용산 역에서 경원선을 타면 되겠군요. 내리는 역은 어딥니까?"

"철원에서 내려서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걸어가면 됩니다."

"어디 보자, 철원 행 여객 열차는 오전 9시 30분부터 3시간 간격으로 있군. 지금 용산 역으로 나가면 1시 반 차를 탈 수 있겠어." 설홍주는 시간표를 접고 몸을 빙글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왕도손 군, 별 일이 없다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당연히 가야지. 숨겨진 보물찾기라니, 듣기만 해도 흥미가 돋는 사건이군. 이런 일에 빠질 수야 없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외치자 설홍주는 빙그레 웃으며 손뼉을 쳤다.

"결정됐군. 그럼 간단히 짐을 싸서 나가도록 하세."

우리는 즉시 작은 짐 가방에 갈아입을 속옷을 챙겨 넣고 나갔다. 나는 소박한 잿빛 치파오 차림이었지만, 설홍주는 전형적인 모던보이답게 몸에는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머리엔 헌팅 캡을 눌러쓰고 손에는 감나무 스틱을 들었다.

그리고 전차를 타고 용산 역에 나가 철원 행 열차표를 산 다음에, 남는 시간 동안 플랫폼에 앉아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싸구려 도시락을 사 먹었다. 설홍주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서양풍의 역사 건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북유럽풍의 용산 역사도 나쁘진 않지만 르네상스 양식의 경성 역사에 비견할 수야 없을 걸세. 나중에라도 여유가 생기면 경성 역 그릴에 앉아 그 우아하고 세련된 고전미를 즐기며 런치(점심)를 먹고 싶군. (주 9)"

그 말에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 군, 같은 값이면 거기서 함바그 스테키(햄버거 스테이크)를 먹기보다는 인천의 중화가에서 동파육과 해삼 찜을 먹는 편이 백 번 나을 걸세."

"왕 군, 청요리에 대한 자네의 애착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네만, 가끔은 전통을 떠나 모던한 맛에 도전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청요리란 표현은 어쩐지 불쾌하게 들리는군. 기왕이면 중화요리라고 해 주게나."

막 논쟁에 불이 붙으려는 찰나, 요란한 기적 소리를 울리며 열차가 들어왔다. 우리는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자리를 찾아 기차간에 올라탔다.

- 계속 -

(주 1: 의열단원 김상옥은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했다. 같은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뒤 자결했다.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1923년 일왕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동거녀 가네코 분코와 함께 체포되어 1926년 사형 판결을 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옥살이를 계속해 일제 치하 최장기 장기수로 기록된다. 6.25 전쟁 당시 월북, 1974년 사망했다.)

(주 2: 당시 일본 지배층은 일본 통치에 항거하는 조선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렀다.)

(주 3: 당시 연희전문의 물리학 교과서는 킴볼(Kimball)이 쓴 [일반물리학]이었다.)

(주 4: L. A. Becker 교수(1879-1966). 한국 이름은 백아덕. 1911년 미시간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21년에는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연희전문의 물리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1948년에 은퇴해 미국으로 귀국했다.)

(주 5: 당시 유명했던 일본의 만년필 메이커)

(주 6: 3.1 독립만세운동을 가리킨다.)

(주 7: 나대용 장군. 1556~1612년. 자는 시망, 호는 체암. 거북선 건조의 실질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충무공과 함께 15여 회의 해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주 8: 일파의 족보는 파보라 하고, 각 파를 아우르는 성씨 전체의 족보를 대동보라 한다.)

(주 9: 서울역 그릴. 조선 최초의 양식당으로 1920년대에 개업했는데 당시에는 최고급 식당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울역에서 소박한 양식당으로써 영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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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sang | 2006/11/12 19:45 | 창작 / 번역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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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6/11/1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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