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경시청의 주임 경감 헨리 티베트는 아내 에미와 함께 이탈리아의 산타 키아라로 스키를 타기 위한 휴가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의 이면에는 산타 키아라가 중심이 된 국제적 마약 조직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한 밀명이 있었다.그는 정체를 숨긴채 스키를 타기 위해 찾아온 여러 국적의 스키어들과 친분을 나누며 스키를 즐기지만 이윽고 마약 밀매의 중심인물로 의심되는 프리츠 하우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뒤, 이탈리아 경찰 스페치 경감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 하지만 프리츠 하우저가 살해된 당시 가능성이 있던 용의자들은 모두 제각기 동기가 있던 상태여서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진다. 이후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범인을 확신한 헨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던 리프트 관리인 마리오 영감이 무언가를 고백하기로 한 날 마리오 영감마저 프리츠 하우저와 동일한 모습으로 살해당하고 헨리는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고민하게 되는데... 패트리샤 모이즈의 처녀작 장편으로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별로 화제거리도 되지 않는 작품이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한번 손에 잡게되니 정신없이 읽게 되었네요. 초반에는 사실 굉장히 지루했습니다. 본격적인 사건인 프리츠 하우저 살인 사건이 벌어질 때 까지의 100페이지에 이르는 너무나도 길고 긴 스키어들과 스키장의 묘사는 참기 힘들정도로 따분했거든요. 그러나 사건이 벌어진 뒤의 이야기는 흡입력이 넘칩니다. 요새 기준으로 본다면 소박하게 느껴지는 단(!) 두건의 살인 사건만 등장하지만 두 사건 모두 상세한 시간표까지 등장시키는 등 정통파에 기반을 둔 본격 트릭이라 저같은 본격 애호가에게는 참 좋은 선물이었다 생각되네요. 마지막 장면에 헨리 티베트가 결정적 힌트를 얻는 부분까지 독자에게 공평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서 "독자에의 도전" 같은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고요. 그리고 현대 추리소설에서 많이 간과되는 부분인, 제가 좋아하는 "동기" 부분까지 모든 용의자에게 고르게 혐의가 갈 수 있도록 상세하게 설정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첫번째 사건에 비해 두번째 사건은 어느정도 억지가 있긴 했습니다. 예를 들면 "발자국" 문제는 차라리 눈이 오는걸 기대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고 활강 자체는 너무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이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두 사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구현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범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만드는데에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범죄로 보기에는 아쉬운점이 있어 보이네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영어, 이탈리어어, 독일어가 각각 쓰이는 상황을 가지고 보다 더 재미있게 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성탐정록 첫번째 이야기 같은 트릭이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뭐 이런저런 결점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최소한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만족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걸작"이라고 칭하기에는 좀 부족하더라도 말이죠. 헨리 티베트 경감도 시리즈 캐릭터인 모양인데 후속작도 보고 싶어지게 만들더군요. 단,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여류 작가 특유의 귀족적 취향과 로맨스적인 설정이 좀 과도한 것은 옥의 티였습니다. 애거서 여사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2차대전 이후 비교적 현대로 넘어온 시대의 소설 치고는 너무 낭만적이랄까요? 특히 맨 마지막의 남작의 액션씬(?) 은 정말 아니올시다 였거든요. 뭐 재미를 해칠 정도는 아니지만 거슬리긴 하네요. 그나저나... "눈 쌓인 산장+스키장과 거기 묵는 악인을 중심으로 모인 많은 사람들" 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에서 제일 처음 등장했는지는 좀 궁금하네요. 본격물이 등장하기 딱 좋은 무대잖아요. 최소한 김전일의 "타로 산장" 에피소드가 이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리프트가 굉장히 적절하게 쓰인 점만 보더라도 말이죠. 솔직히 이 소설처럼 관광명소가 된 스키장이라면 모를까 김전일의 타로 산장같은 펜션이 리프트 같은 거대 시설을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유를 이제서야 좀 알겠네요. 야마기 세이마루 씨가 이 작품을 읽고 "나도 써먹어야겠다!" 라고 두 손을 불끈 쥐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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