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모비딕 : 별점 2.5점 Book Review - 추리 or 호러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6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고전을 좋아라하는 저로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편집인데... 내용은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이라기 보다는 "쇼트쇼트"가 연상되는, 조금 희한한 상상력이 발휘된 초단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스타일보다는 추리적인 색채가 짙다는 차이점이 있지만요.

이쪽 장르도 좋아해서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실려있는 작품들의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는 점,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에 비해 전개가 낡고 지루하며 결말의 의외성이 없는 등의 단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러한 점은 쓰여진 시기를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었겠죠. 그러나 막 나가는 전개의 작품도 몇개 있는데 의도인지, 아니면 습작들이 이상하게 뭉쳐져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인지도 궁금해지더군요. 탈영병이 거름 더미 속에 몇달 숨어있다가 잡혀온 이야기와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상이용사 연금까지 받던 로이지크가 양심 때문인지 정말로 불구가 되어간다는 이야기가 하나로 묶여있는 <실종된 다리>가 좋은 예입니다. 어차피 초단편이라면 나누어 수록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하나로 묶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역시나 쓰여진 시기 탓인지 "양심"에 대한 것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띕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너무 선한 인물들이라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에 가책에 의해 여러가지 갈등을 빚는다는 내용이 많거든요. 아무래도 좋았던 시기에 착한 사람이 쓴 작품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묘하고 기발한 발상은 좋지만, 지금 읽기에 너무 오래되긴 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추리물 성향을 지닌 작품부터 소개해 드리자면,
<도둑맞은 선인장>
식물원에서 귀한 선인장이 도난당하자 선인장에 치명적인 질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조작하여 발표한 뒤 약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잠복하다가 범인을 체포한다는 내용입니다. 식물원에서 훔친 방법도 기발한데 나이든 여자로 변장하고 가슴에 화분을 숨겨 나왔다는 것이죠.

<하르쉬의 실종>
아르메니아인들이 하르쉬를 어떻게 죽이고 시체를 옮겼는지에 대한, 즉 시체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굉장히 쉬운 트릭이기는 하지만 범행 당일 비가 왔다는 것, 그리고 카펫 속에 시체가 들어있다는 사실과 하르쉬 시체의 기묘한 반점을 연결하는 부분은 괜찮았어요. 명탐정 메이즈리크의 활약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도난당한 살인사건>
범인들이 경찰로 위장한 뒤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뒷수습한다는 이야기. 목격자는 많았지만 경찰 복장을 한 범인을 보고는 단지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죠. <오터모울씨의 손>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런 트릭의 원조격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영아 납치 사건>
사라진 영아를 찾기 위한 바르토세크 반장의 활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찰들에게 아기들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군요. 몇 개월 됐나요?"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그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아기를 숨긴 어머니를 체포하게 된다는 내용이죠. 모든 아이 어머니는 아이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심리를 이용한 트릭에 더해 전반적으로 유쾌한, 블랙 코미디스러운 전개가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법정물도 있습니다.
<하브레나의 판결>
기자들이 법정 소식을 실으려고 노력하던 중, 실제 법정에서의 사건보다 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창조하는 하브레나라는 인물에게 창작의 댓가를 지불하고 이야기를 전해받는다. 하브레나는 스스로 법에 대해 통달했다고 여기는 인물인데 어느날 그가 창작한 이야기, 즉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자를 볼 때 마다 "화냥년"이라고 말하게 만든 늙은 독신남이 실형을 선고받는다는 이야기가 실제 법조인 등 관련된 사람들에게서 잘못된 판결이라고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하브레나는 자신의 이야기 속 판결이 정당하다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인에게 욕설을 하게끔 만들고 법정에 서게 된다는 내용.
설정부터 흥미롭지만 진행 과정 역시나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었던 작품이에요.

법의학물의 선구적인 작품도 있습니다.
<바늘>
롤빵 속에 들어간 바늘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국립화학연구소의 우헤르 박사가 빵과 바늘에 대한 모든 상황을 검토한 끝에 롤빵이 만들어진 뒤에야 바늘이 들어갔다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바늘을 누가 넣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빵을 찾기 위해 화학자들이 빵을 수도 없이 만들어본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기도 해요. "옹고집"이라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죠.

반전이 괜찮은 작품도 있습니다.
<우표 수집>
한 노인이 과거를 회상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하층민인 로이지크와 절친이 된 뒤 우표 수집에 빠져 살았지만 성홍열로 앓아 눕고 얼마 뒤, 둘만의 비밀 장소에 숨겨둔 우표가 사라지자 로이지크를 의심하여 그와의 우정이 결딴나게 됩니다. 본인 스스로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게 되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표를 숨긴게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고해>
너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탓에 마음이 무거워진 범죄자가 신부, 변호사를 찾아가 죄를 털어놓는다는 이야기. 신부와 의사가 이러한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죠. 반전은 마지막에 그에게서 고백을 들은 의사가 모르핀 주사 2방을 추가로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는 괴로워하지 않게 말이죠.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유쾌한 범죄극도 인상적이에요.
<여의주와 새>가 대표적으로, 진귀한 카페트를 훔치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엄청난 슬랩스틱으로 묘사된 작품입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더라고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기발한 작품들도 많습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마친 뒤 시를 남겼는데 우연히 그 시를 지역 신문에서 극찬하자 도둑의 창작욕이 폭발하여 도둑질은 시를 발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간다는 <서정적인 도둑>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네요.

영어를 못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영국 방문 중 우연히 한 남녀의 이야기를 몰래 듣는데, 둘의 이야기를 음악처럼 듣고 그 속의 범행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이야기>. 남자의 사악한 말은 묵직한 베이스 뭐 이런 식인데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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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15/01/20 19:59 #

    <로봇>의 아버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추리적인 글도 썼군요.
  • hansang 2015/01/21 07:54 #

    네. "메이즈리크"는 나름 저명한 탐정인듯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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