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조커 1 - 다카무라 가오루 / 이규원 : 별점 3.5점 Book Review - 추리 or 호러

레이디 조커 1 - 8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석양에 빛나는 감>>, <<마크스의 산>>이라는 묵직한 사회파 범죄 추리 소설을 발표했던 다카무라 가오루의 또다른 대표작.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에 29위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국내 소개가 상당히 늦었네요. 문학동네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1권만 우선 읽게 되었기에 리뷰 전 먼저 문학동네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 절판된 고려원 출간본으로 두 작품 모두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팬인데 이렇게 읽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참고로 원래 저는 완결까지 다 읽지 않으면 리뷰를 쓰지 않습니다만 이번에 1권만 리뷰를 올리는 이유는 이벤트 조건 때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 이렇게 권별로 나눠서 쓰는게 리뷰로서 나름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네요. 1권에서의 감상이 후속권에서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 개인적인 흥미거리가 많아 보이거든요. 앞으로도 이렇게 리뷰를 쓸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드는군요.

리뷰로 돌아가서, 이번에 읽은 1권은 목차와 동일하게 4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947년의 괴문서, 1990년, 1994년, 1995년으로요.
서두를 장식하는 1947년의 괴문서는 종전 직후 오카무라 세이지가 히노데 맥주로 보낸 장문의 투서입니다. 내용은 일부 동료 직원들이 '부락민' 출신이라 차별 받았고, 결국 퇴사에 이르렀다는 증언이고요. 이 투서와 관계된 인물들이 수십년이 지난 1990년 이후, 현실에 맞닥트리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1990년,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치과의사 하타노가 바로 부락민의 후손이며, 그의 아들도 이 이유 때문에 히노데 입사가 좌절되었다는 내용이거든요. 입사가 좌절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죽은 후 하타노는 일종의 분노심에 사로잡혀 정체도 알 수 없는, 니시무라라는 인물과 엮인 후 이 수십년 전의 투서를 히노데 맥주로 보냅니다.
이후 하타노는 자살하지만 그의 장인이자 수십년전 투서를 보낸 오카무라의 동생인 약국 노인 모노이 세이조와 그의 경마장 친구들이 의기투합해서 '레이디 조커'라는 그룹을 만들고는 히노데 맥주에 거액을 요구할 계획을 꾸미죠. 그리고 이들에 의해 히노데 맥주 사장 시로야마가 납치되어 풀려나기까지가 1권의 주요 내용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총 3권으로 이루어진 대장편의 1권인 탓에 큰 이야기로 보면 도입부에 불과하기는 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주요 범행 동기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을 뿐이며, 정작 중요한 범행은 맛보기 수준으로만 보여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아니,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리고 절망에 빠진, 벽에 부딪힌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네요.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고 우직하게 살다가 남은건 하나도 없는 모노이 노인에 대한 묘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묘사와 중요도의 비중 모두 1권의 주인공 격인 인물인데 그야말로 처절한 삶이라는게 뭔지 절절하게 느껴지도록 묘사되고 있거든요. 가난한 촌락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하여 근근히 살아온 인생인데 사건 없이 이러한 모노이 노인의 삶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 드라마는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 속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는 기리노 나쓰오를 연상케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보다는 처절하고 스멀거리는 느낌이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는 것도 장점이죠. 기리노 나쓰오는 피 뚝뚝 떨어지는 듯 한 날 것 느낌을 전해 주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정제되고 세련된 탓으로 회와 초밥의 차이 정도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저는 두 작가, 두 음식 모두 좋아합니다. 단지 취향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정도 뿐입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묘사 덕분에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 범행 동기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아무리 오래 보아왔던 사이라지만 경마장에서 본 노인의 범행 제안에 모두들 선뜻 나선다는건 받아들이기 힘들잖아요?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사회의 패배자들, 아웃사이더들이 의기투합하는 과정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듯한 비현실적인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는 모노이 노인과 레이디 조커를 응원하게 될 정도입니다!

묘사 외에도 앞서 말씀드린 투서에서부터 시작되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하타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투서와 등장인물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한껏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데 몰입도가 상당하거든요. 그만큼 이야기가 탄탄하게 묘사된 캐릭터들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습니다. 우선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히노데 맥주 관련된 설정은 일본의 전형적인 정관 유착, 그리고 각종 일본 내 스캔들을 참조한 듯한데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설정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등장 인물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직 형사인 한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모노이 노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굴레에 갖혔고, 운전사는 장애인 딸이라는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굴레가 있는 반면 한다는 공대를 나와 경찰에 투신한 것부터 시작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중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여 현재에 이르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절하고 벽에 부딛힌건 다 본인 탓이죠. 그래서 남 탓, 특히 고다 형사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건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사메지마와 똑같은, 흔히 보아왔던 전형적인 한마리 늑대 캐릭터로 천편일률적이라 식상하기도 했고요.
또 신용금고에서 일하는 고가 조직에 합류한 이유도 불분명해요. 단지 노모이, 한다가 "그 놈은 무조건 참여할거다" 라고 단정한게 전부인데 이래서야 좀 부족하죠. 평생 생활고에 시달린데다가 부락민 출신 사위 때문에 손자마저 죽은 노모이, 독단적인 수사로 한직으로 밀려나 경찰 조직과 수뇌부를 증오하게 된 한다, 평생 무료하고 지루하게 살아가며 사고로 손가락마저 잃은 기계공 요짱, 자위대 출신으로 장애인 딸 수발에 평생을 바친 누노카와처럼 일본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들과는 다르게 고는 아무리 봐도 아웃사이더로 보이지도 않고요. "재일 조선인" 이라는 잠깐 드러나는 그의 설정은 아웃사이더스럽지만, 그에 따른 묘사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부족해서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디조커 조직과 히노데 맥주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얻으려는 회색분자로 보였는데, 제 짐작이 맞을지는 후속권에서 밝혀지겠죠,
이들의 주도로 벌어진 시노하라 사장을 유괴한 범행도 이해는 되지 않아요. 대기업의 비자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위한 목적 치고는 너무 큰 범죄를 벌인 셈이니까요. 자신들의 위력, 힘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 범행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수사 본부가 조직됨은 물론 고다 형사에게 '현직 경찰이 포함되어 있다' 는 단서를 전해 주는 등 득보다는 실이 훨씬 커 보입니다. 그냥 사장을 덮쳐서 데려가는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협박장만 주는걸로 충분했읉텐데 말이죠. 이 부분은 제가 눈치채지 못한 협박 외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후속권을 읽어보고 최종 판단토록 하겠습니다.
특유의 묘사력도 일품이지만 지나치게 장황한 감도 없잖아 있어요. 이런 일본 여성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너무 생각이 없이 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생각이 많은데, 지나치니 없으니만 못하다는 옛 속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히노데 맥주가 움직이는 돈의 단위도 현실적이지가 않아서 이러한 거대한 돈의 움직임이 주인공들과 어떻게 엮일지가 잘 와 닿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등장인물과 범행 동기들의 묘사를 통해 보장된 설득력이 범행 대상의 비현실적인 측면 때문에 조금 빛을 잃는 느낌이었어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말단 형사가 소시민과 어울려 거대 사건에 휩쓸린다는 흔해빠진 헐리우드 액션물 수준의 설정이라 작품 분위기, 묘사와의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단점을 잔뜩 열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음 권에 대한 기대는 충분합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도입부로는 최고 수준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고다 형사는 어떻게 범인들을 추적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게 만드니까요. 몇몇 단점들은 후속권에서 잘 처리하면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노이 노인에게 감정이입해서 노인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는데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빨리 다음권을 읽고 싶네요. 1권의 별점은 3.5점입니다.
다카무라 카오루의 팬 뿐 아니라 일본 사회파 장편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기리노 나쓰오나 미야베 미유키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이벤트라고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건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은 잘 아시겠죠? 다른 작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감을 뽐내면서도 재미까지도 확실한 작품입니다. 확실히 대표작은 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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