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5점 Book Review - 추리 or 호러

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남편 맥심과 함께 작은 호텔에 머물며, 과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대저택 맨덜리에서의 생활을 회상한다.
'나'는 결혼 후 드 윈터 부인으로 맨덜리에 살면서, 맥심 드 윈터의 전처 레베카가 비참하게 사고로 죽었지만 아직도 맨덜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는걸 느낀다. 그런데 우연히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녀 죽음에 대한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조사가 다시 시작된다. 맥심 드 윈터는 '나'에게 자신이 그녀를 살해한 뒤 시체를 숨긴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전설적인 장편 소설. 18~20세기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상류 사회와 로맨스, 범죄호러를 결합한 '고딕'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중 한 편이지요. 'MWA 추천 미스터리 100'이나 '동서 미스터리 100' 같은 이런저런 리스트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만큼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이렇게 두꺼운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숙제를 끝내기 위한 사명감 비슷한걸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끝내기는 정말로 어렵더군요. 이야기의 2/3 대부분이 드 윈터 부인의 1인칭 심리묘사인데, 그녀의 마음에 전혀 공감할 수도 없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어린 철부지 소녀가 급작스럽게 대저택의 안주인이 된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에요. 그러나 맨덜리 저택과 그 주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라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져 시종일관 소심함을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 눈치를 신경쓰고 그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에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황스럽고, 철부지였다 하더라도 대저택 안주인으로 몇 개월 보냈으면 당연히 적응을 했어야죠. 몇 개월이 지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극복 하지 못하고 손톱이나 물어 뜯는 모습에는 공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그녀의 어리버리함이 지나치게 부각되기 때문에, 저택 주변에 항상 맴도는 '레베카'의 그림자가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레베카를 숭배했다는 저택 관리인의 우두머리 댄버스 부인의 악의만큼은 실감나게 느껴집니다만, 이 역시 그녀가 어설퍼서 댄버스 부인의 증오를 초래한 것에 불과합니다.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에게 자신이 이제부터 드 윈터 부인이며, 그녀의 윗 사람이라는걸 처음에 확실하게 인지시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거든요. 댄버스 부인이 굴복하던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알아서 떠나버렸을테니까요.
심지어 지나치게 상황 인식이 부족한 탓에 스스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레베카가 정숙하지 못했다는걸 눈치채고 있습니다. 저택을 몰래 방문했던 사촌 파벨이 레베카의 문란한 생활 속 상대 중 하나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고요. 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맨덜리에서 오랫만에 수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댄버스 부인이 사근사근하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러나 딱 한 명, 주인공 드 윈터 부인만 모를 뿐이지요. 이래서야 드 윈터 부인이야말로 문제의 원흉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남편 맥심이 그녀의 적응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건 이해합니다만, 그녀가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에요. 맥심지어 유일한 그녀의 편인 영지 관리인 프랭크에게는 어려운 상황과 댄버스 부인의 적의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와 같은 말로는 부족했어요. 특히나 댄버스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레베카의 사촌 파벨을 맨덜리에 들였던게 탄로난 건은 하인으로서 하면 안될 일입니다. 이걸 꾸짖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댄버스 부인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루함을 참고, 2/3 정도를 지나면 다행히 명성을 회복합니다. 무도회에서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의 복수로 레베카의 옷을 입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진 직후, 레베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맥심 드 윈터는 아내에게 자신이 레베카를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고 고백하고요. 레베카가 저질렀던 온갖 부정들이 여기서 맥심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후 명백한 침몰 흔적때문에 벌어지는 재심리, 자살로 대충 결론내려지지만 이의를 제기한 사촌 파벨의 협잡 등 여러번의 위기가 몰아치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렇게 맥심 드 윈터에게 위기가 연이어 닥치고, 하나씩 위기를 넘는 듯 하지만 위기가 계속되는 전개는 그야말로 '서스펜스'가 뭔지 그 답을 제시해 주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파벨이 찾아와 협작질을 벌이는 날, 여러 명의 관계자들을 소환해 진상이 무엇인지를 추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맥심!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더라고요.
아울러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며 소녀에서 진짜 귀족 여성이 되는 드 윈터 부인의 성장기로서도 볼 만합니다. 그녀의 맥심을 향한 장황한 심리 묘사에 더해, 맥심은 레베카를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진짜 사랑한건 자신이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은 이 작품이 로맨스가 중요한 요소인 고딕이라는 장르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고요.

그러나 치안판사 줄리언 대령이 직접 수사에 나설 정도의 단서를 파벨이 제시한게 맞는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레베카가 만나자고 보낸 쪽지를 들고 있던건 사실이지만, 그 쪽지가 레베카가 사망한 날 쓰여졌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지로 지역 명사를 협박한 파벨을 체포하여 재판하는게 당연한 수순이에요.
레베카가 몰래 의사를 찾아간 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걸 알게 되었다는 결말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자살 겸 해서 일부러 맥심 드 윈터를 도발한게 진상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쪽지를 남긴 이유는 설명되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댄버스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네요.
무엇보다도, 맥심 드 윈터가 어찌되었건 아내를 살해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정숙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응징으로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범죄에요.빅토리아 시기 직후, 20세기 초반에야 레베카의 부정이 죽을 죄였을지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건 무리죠. 어떤 식으로건 단죄는 필요하다 생각되어서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단지 저택을 잃은 정도로 끝나기는 부족했어요. 이 때문에 작은 호텔 등에 숨어산다는 현재 역시도 그게 얼마나 큰 벌인지 잘 와 닿지도 않았고요.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레베카의 사인은 사고사이며 결말은 해피엔딩이라는데 저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위한 각색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식이기는 하지만, 이 쪽이 더 명확해서 좋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울러 진상을 눈치 챈 댄버스 부인의 복수도 허망합니다. 저라면 드 윈터 부부가 돌아온 직후, 불을 질렀을 거에요. 그깟 저택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후반부 1/3은 고딕 미스터리의 대명사다운 놀라운 서스펜스와 몰입감을 자랑하지만, 2/3 분량의 지루함에 대한 압박이 커서 감점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낡은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걸작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현대 독자라면, 영화 쪽을 감상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에서 중요한 요소로 쓰였던, 다과회에 나왔다는 비밀 샌드위치는 어디에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샌드위치는 맥심의 할머니가 티 타임에 먹은 물냉이 샌드위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된 오이 샌드위치가 기억에 남을 뿐인데 말이죠. 여기서 무언가 요리를 발췌한다면, 드 윈터 부인이 처음 보고 놀란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나, 매형 자일즈가 감탄하는 영국에서 제대로 된 음식의 대표격인 수플레, 차를 마실 때 빠지지 않는 스콘과 카스텔라가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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