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 정해연 : 별점 3점 Book Review - 추리 or 호러

홍학의 자리 - 6점
정해연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혼 직전 상황에서 지방 고교에 발령받아서 혼자 내려가 살던 김준후는 제자 채다현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날, 준후와 다현이 교실에서 관계를 맺은 직후 다현이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발견한 준후는, 자신의 인생이 파멸할거라 여겨 시신을 둘이 밀회를 위해 자주 찾던 인적없는 호수에 유기했다.
며칠 뒤, 시신은 발견되었고 사건 수사를 받은 강치수 형사는 준후의 불합리했던 진술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모처럼 읽어본 한국산 범죄 스릴러. 적절한 분량, 빠른 호흡과 적절한 긴장감,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추리적인 장치들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준후가 다현의 시체를 삼은 호수에 유기했던 트릭이 괜찮았어요. 검시 결과 밝혀진 다현의 사망 시각에 준후의 차는 호수 방향 모든 길 CCTV에 찍히지 않았습니다. 호수로 향하는 길은 험했고, 다현의 시체에도 긁힌 상처 하나 없어서 사람이 끌고갈 수는 없었고요. 어떻게 유기했던 걸까요?
준후는 다현의 시체를 일단 자택 욕조로 옮겨 놓은 뒤, 장기 결석 핑계로 다현의 집을 방문하는 척 할 때 삼은 호수를 지나며 시체를 유기했던 겁니다. 이는 부검 결과, 다현의 폐에서는 플랑크톤이 검출되었지만 신장, 심장, 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는걸로 증명되고요. 사인은 익사인데 플랑크톤이 나오지 않았다면, 수돗물로 죽었다는 뜻이니까요.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만, 이를 밝혀내는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작중에서 김준후가 집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는 묘사로 드러내는게 좋았습니다.

다현이 사실은 남자였다는걸 마지막에 드러내는, 서술 트릭의 효과적인 사용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여자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남자였다는건 흔한 설정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는 꽤 잘 숨기고 있는 편이에요. 읽으면서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였어요. 또 다현과 준후의 관계를 '홍학'을 이용하여 은근슬쩍 독자에게 알리는 솜씨도 제법입니다. 홍학에 집착하면서, 홍학이 산다는 아루바 섬에 가고 싶다는 다현의 소원은 유치한 캐릭터 만들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현이 남자라는게 밝혀진 뒤 그 의미가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홍학은 동성끼리 새끼를 키우고, 아루바는 네덜란드 령으로 네덜란드는 동성 결혼이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현은 준후와 아루바로의 여행을 꿈꿨던 겁니다. 즉, 다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꽤나 결정적인 단서를 초반부터 제공해 준 셈입니다.
준후가 아내 영주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지고, 심지어 아이까지 있다는 설정은 좀 반칙같기는 했지만, 실제 양성애자도 있고, 이런 사례가 없는건 아니니 허용범위 이내겠죠.

수사물로도 꽤 수준이 높습니다. 앞서 사체 유기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은 물론, 준후가 CCTV 사각을 피해 시신을 교실에서 외부로 옮긴 방법에 대한 추리와 수사도 돋보였어요. 준후는 경비원이 3층 순찰을 돌 때 마주친 뒤, 경비원이 4층 순찰을 다 마치고 경비실로 돌아올 때 까지 차에서 기다렸다고 진술했습니다. 사실은 3층의 완강기를 이용해서 시신을 1층에 내려놓고,CCTV가 있는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나와 본관 옆에 차를 대고 시신을 실은 뒤, 완강기는 잠기지 않은 창문을 통해 계단으로 올라가 원위치 시켜 놓았었지요. 강치수 형사는 이 때 15분이라는 공백이 발생한걸 수상하게 여깁니다. 경비원 순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건 그럴싸한 핑계였지만, 그렇다면 누구나 교문 앞에서 기다릴텐데 교문에서도 멀고 경비실이 보이지도 않는 본관 옆에서 기다린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요. 이를 통해 창문과 완강기에 대한 분석을 벌이게 됩니다.
다현과 준후가 밀회를 위해 이용했던 다현의 핸드폰은, 준후가 발급받았었기 때문에 초반 수사 과정에서 걸리지 않았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수업 전에 핸드폰을 수거했다가 하교 시 다시 나누어주는데, 이 때 폰이 바뀔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별도의 폰을 마련해 주었다는건 분명 타당한 이유가 되니까요.
수사 과정에서 드러낸 준후의 수상한 행적을 준후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억지 변명이기는 한데, 말이 안되는게 아니라서 경찰도 당장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면서, 적절하게 충격과 긴장을 안겨다주는 덕분에 몰입도도 높습니다. 다현의 죽음과 사체 유기, 다현의 사인이 익사라는게 드러나는 장면, 준후가 협박장을 받는 장면, 경비원 황권중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 교무부장 조미란이 체포되는 장면 등 단락마다 극적 긴장감을 한껏 높이며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 김준후입니다. 그는 초반에는 다현의 상황에 가슴아파하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진범이 밝혀지기를 원했고요. 다소 어설픈 사체 유기도 그 일환인 것처럼 설명됩니다. 사체가 발견되어야 수사가 진행되어 진범이 밝혀질 수 있다는 이유였지요.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악당으로 돌변해버립니다.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만 신경써는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다현의 죽음 따위는 진작에 잊어버렸다는데 그 변모가 거의 다른 사람 수준이에요. 이를 위한 별다른 설명도 없고요. 처음에는 교사로서의 지위를 잃고 파멸할게 두려워 다현의 시체를 유기했다고 설명되는데, 뒤에서는 교사라는 직업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하니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럴 바에야 애초에 시신을 좀 더 철저히 유기했더라면 만사 형통이었을겁니다.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 이후, 불화가 있던 아내 영주의 돈까지 끌어모아 해외 도주를 시도한다는건 그야말로 최악이었고요. 이 와중에 김준후의 아내 영주는 왜 이혼을 하려고 하지 않는지, 왜 재결합을 원해서 지방까지 따라 내려왔는지 등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경비원 황권중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는 별 생각없이 태만하게 근무하는 사람좋은 아저씨로만 보였는데, 현장의 증거를 확보한 뒤 준후를 협박한다는건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초반부터 철저하고 깐깐한 아저씨로 묘사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황권중의 협박으로 비롯된 사건들도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김준후가 협박에 응하지 않는건 당연했어요. 자기는 범인이 아닌게 확실하고,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범인이라는 협박에 직접 움직인다는건 바보짓이니까요. 어설프게 김준후가 행동에 나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김준후에게 보낸 협박장을 본 조미란이 직접 나서 황권중을 죽였다는 건 더 이상합니다. 다현을 죽인 진범이 자기 아들 은성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를 죽였다는데, 협박장이 보내진 상황을 보면 황권중은 김준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미란이 황권중을 서둘러 죽일 필요는 없지요. 죽이기 전에, 김준후와 만나서 무얼 어떻게 하는지를 먼저 살펴보는게 당연했습니다.
물론 이 범행은 어머니의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면 아예 말이 안 되는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조미란이 지극히 간단한 수사에 의해 체포되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아들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쉽게 체포되는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셈이잖아요? 조미란을 체포한 후, 경찰이 심문할 때 은성이를 불러다 함께 심문을 한 것도 법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았고요.
애초에 황권중이 확보했던 증거라는 다현을 매달았던 끈을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도 좀 납득이 되지 않은 등, 여러모로 황권중 사건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벌였던 무리수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다현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진상도 놀랍기는 했지만, 설득력이 약한건 마찬가지였어요. 다현이 자살한 동기까지는 납득이 갑니다. 준후와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걸 깨닫고, 친구한테도 용서받지 못해서 죽음을 택했다는건 꽤나 타당한 이유니까요. 그러나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처럼 위징해서 자살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자살로 밝혀지면 준후가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걸까요? 다현이 목을 매는 끈을 손으로 쥐고 몸을 끌어올린 뒤 목을 집어 넣어 죽었기 때문에 아래에 발판이 없었다는 진상을 다현이 사실 남자였다는걸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한건 효과적이었지만, 이를 위해 다소간 억지를 부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준후에게 복수하는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준후의 체액을 몸에 담은 채 유서를 쓰고, 학교 운동장에서 목을 메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이래서야 개죽음일 뿐이지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읽은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서술 트릭이 사용되어 영상화나 시각화는 어려운만큼, 반드시 책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덧글

  • rumic71 2021/11/20 23:31 #

    양성애자도 많고, 일코하느라 이성과 결혼하는 동성애자도 많아요. 이런 경우는 반드시 외도하고요.
  • hansang 2021/11/22 00:12 #

    그렇군요. 현실적인 설정이었네요.
  • RNarsis 2021/11/22 15:58 #

    혹시 스즈미야 하루히의 직관 리뷰하실 생각 없으신지요? 가끔씩 추리소설풍 단편 에피소드를 집어넣곤 했지만, 이번 편은 꽤 긴 분량(얇은 라이트노벨이라면 이것만으로도 1권은 될 정도로) 긴 장편의 추리풍 에피소드를 집어넣어서 이채롭더군요. 시리즈의 장르가 바뀌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 hansang 2021/11/25 22:56 #

    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고 리뷰를 남기고 싶네요 ㅎㅎㅎㅎ. 라이트 노벨이라고 멀리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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