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후 패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일본, 남방 필리핀에서 생환한 도쿄대 의학부 출신의 마쓰시타 겐조는 우연찮게 문신을 한 사람들로 조직된 "에도 조용회"라는 단체의 총회에서 등에 오로치마루의 문신을 새긴 기누에라는 여인을 알게된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 문신사 호리야스의 딸로 그 문신은 도쿄대의 문신 수집가 하야카와 박사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태.그녀는 첫 만남부터 겐조를 유혹하며 생명이 위험하다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남기고 각각 "지라이야"와 "쓰나데히메"의 문신을 새긴 오빠와 쌍동이 동생의 사진을 전해준다. 그녀의 전갈을 받고 아침 일찍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겐조는 하야카와 박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며 그 집 안의 밀실인 목욕탕안에서 몸통이 사라지는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겐조의 친형이자 경시청 수사과장인 에이이치로는 기누에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를 펼쳐 정부인 모가미 다케조를 지명수배하나 다케조마저 빈집에서 시체로 발견되며 겐조가 사건을 알려준 후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진범을 파악한 기누에의 친 오빠인 노무라 쓰네타로까지 살해당하게 된다.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되며 노무라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던 겐조는 "천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선배 가미즈키 요오스케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으로 도대체 언제쯤 번역되나 기다리고 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간략한 줄거리만 본다면 일본 특유의 변격물 취향이 짙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이 작품은 변격물로서만이 아니라 정통 추리물과의 절묘한 결합에 성공하고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변격물 특유의 엽기적인 살해방식이나 기괴한 묘사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다른 변격물처럼 범죄의 엽기성에 주목하지 않고 정통 추리물 특유의 트릭이나 사건 전개 및 해결 방식을 잘 결합하여 상당히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범인이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가 좋은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던가, 3건의 사건 중 제일 첫번째 사건 처럼 "밀실안에서 몸통이 사라진 시체"라는 엽기적인 사건 내면에 왜 몸통이 없어져야만 했는지에 대해 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잘 조합한 점이 특히 그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변격+전통 추리가 교묘하게 얽힌 현대 일본 추리 문학의 원조격 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우부메의 여름"과 굉장히 유사하다고도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트릭 자체의 완성도나 설득력은 약간 떨어지는 측면은 분명 있습니다. 3건의 살인 사건 중에 그나마 트릭이라고 부를 만 한것은 첫번째 사건 뿐이고 나머지 사건은 소설 전개상 경찰의 조사가 보다 세밀했다면 밝혀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실 소설 전개만 놓고 본다면 겐조의 결정적 실수 이외에는 경찰의 수사미숙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또한 동기가 워낙에 명확해서 범인을 특정하기가 쉽다는 것도 큰 약점이고요.
거기에다가 탐정인 가미즈카 요오스케가 독특한 천재성을 가진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묘사도 부족하고 극적인 맛이 떨어져 정통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를 놓치는 기분이 듭니다. 탐정보다는 화자에 가까운 겐조의 묘사가 상대적으로 더 세밀하고 재미있을 뿐더러 가미즈카 요오스케의 등장이 소설 후반부에서나 이루어진다는 것도 이러한 기분을 부채질하네요. 범인을 알아내기 위한 용의자들과의 도박, 바둑, 장기를 통한 심리분석도 반 다인 필이 강하게 올 뿐 독특한 맛도 부족했고요. 최소한 작가의 다른 시리즈 캐릭터 사부로 검사 정도로만이라도 표현해 주었으면 추리팬으로서는 더욱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가지 아쉬움을 더한다면 이른바 지라이야-오로치마루-쓰나데히메의 3자견제에 대한 내용 같이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은 제 개인적으로는 만화 "나루토"에서 한번 접해 보아서 이해가 좀 빠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문신에서의 3자견제는 금기다!"라는 설정이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쓰이기도 하는 만큼 그림같은 것으로 설명을 도와주는 배려가 약간 아쉽습니다.
출간 당시에는 당시 일본 추리계의 어떤 매너리즘같은 것을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걸작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약간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분명 재미있기는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이 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이네요. 그래도 그동안 쭉 읽고 싶었던 작품을 완독하니 속시원하긴 합니다. 이제 "흑사관 살인사건"도 읽어 봐야 할텐데 말이죠....
![]() | 문신 살인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남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




덧글
rumic71 2005/05/08 16:54 # 답글
흑사관은 지금 읽고 있는 도중인데, 정말 난해하게 써 놓았습니다. 번역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hansang 2005/05/08 16:58 # 답글
rumic71 : 흑사관은 번역이 초 난감하다고들 다들 말씀하셔서 사실 구입이 꺼려지는 작품입니다...